하동_ 차밭 더하기 둘레길

하동 야생차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왕실에 진상돼 ‘왕의 녹차’로도 불린다. 조선 후기 문신 추사 김정희(1786~1856)는 하동차를 중국 최고의 차인 승설차보다 낫다고 했고, 다도를 정립한 초의선사(1786~1866)도 풍모와 자태가 신선 같고 고결하다고 극찬했다. 찌지 않고 덖는 하동 야생차는 맛과 품질이 우수해 2017년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됐다. 녹차 재배면적만 놓고 보면 전국 대비 23%가 하동에서 생산된다.매암제다원(차박물관)을 가던 날엔 비가 내렸다. 비는 사진 찍는 일을 번거롭게 하지만 그것만 아니라면 분위기를 한껏 자아내기도 한다. 처마 아래 누운 흰개는 관람객에게 혹여 누가 된다고 생각했는지 자꾸만 자리를 피한다. “괜찮아, 그냥 있어도 돼.” 녀석이 처음 본 사람 말을 알아들을 턱이 없다. 여행객도 자리를 피한다. 그래야 흰개가 밥그릇이 놓인 처마 아래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가고 오기를 반복한 녀석의 털은 진작에 젖어 있었다.비를 피해 박물관 옆 찻집에 자리를 잡는다. 창밖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는 것도 나쁘진 않다. 지리산을 타고 내린 빗물엔 새소리가 녹아있었다. 여름비에 깨끗이 세수한 찻잎은 화사하고 예쁘다. 주인의 설명대로 홍차 잎에 뜨거운 물을 붓고 2분을 기다린다. 함께 내어준 모래시계는 빠르게 아래로 쏟아져 내렸고, 물을 머금은 마른 찻잎은 찻주전자 안에서 아껴두었던 맛을 풀어냈다.하동의 차밭은 보성의 차밭만큼 크지 않다.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이 된 악양의 차밭은 평사리 들녘처럼 주로 평지에 있고, 지형이 호리병을 닮은 화개의 차밭은 대부분 산기슭 비탈에 있다. 옆으로 뿌리를 뻗는 일본 차나무와는 달리 야생차 뿌리는 한곳에 곧고 깊게 내린다. 예전엔 새색시에게 차나무를 선물로 주었는데, 시집가서도 오래오래 잘 살라는 뜻이었다.하동 차밭은 지리산과 어우러졌다. 지리산둘레길도 있고, 이름도 아예 천년다향길(천년차밭길)인 트레킹 코스도 있다. 지리산둘레길 원부춘~가탄 구간이 화개 차밭을 지난다. 형제봉 능선을 넘어 화개로 내려선 길은 고되고 힘들지만 이 차밭에서 모든 시름이 훌훌 사라진다. 보성 차밭에 바다가 있다면 하동 차밭엔 섬진강이 있다. 두 곳 다 예뻐서 자꾸 가고 싶고, 갈 때마다 감동하고 감탄한다.화개에 있는 천년다향길은 딱 두 코스. 길을 다 합쳐도 8km여서 내친김에 둘 다 걸어도 좋다. 1코스 출발점은 쌍계사 입구 차시배지, 2코스 종점도 차시배지여서 한번에 모두 걸을 요량이라면 2코스부터 시작해 1코스에서 끝내는 게 좋다. 4시간이면 충분하지만 중간에 찻집에 들릴 경우 5시간은 잡아야 한다. 딱 한 구간만 걷는다면 정금차밭과 도심다원이 있는 2코스가 낫다.하동은 군내의 아름다운 다원 여덟 곳을 별도로 꼽고 있는데, 금방 다녀온 매암제다원을 필두로 명원다원, 고려다원, 도심다원, 쌍계다원, 한밭다원, 정금차밭, 혜림농원, 청석골감로다원이 이에 속한다. 화개엔 약 30여 개의 찻집, 하동 전체로 범위를 넓히면 그보다 훨씬 많은 1천여 가구가 차를 만든다. “언제 한번 차 한잔하자”란 말이 하동에선 허투루 하는 인사말이 아니다. 커피에 익숙한 입안에 지리산의 기운이 한 모금 들어간다. 섬진강의 기운도 꿀꺽 몸속으로 들어간다. 그냥 보아도 좋고, 좁은 고랑을 걸어도 좋고, 따뜻하게 혹은 시원하게 마셔봐도 좋은 우리 차. 남녘의 차밭이 초록의 절정 아래서 손짓을 한다.출처 : 여행스케치(http://www.ktsket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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